나르시시즘이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라는 인물로부터 유래하는 말입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만을 바라보다 탈진해 죽었다고 하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이후 프로이트에 의해 재가공되어 자기애(自己愛)를 뜻하는 단어인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좀 더 친숙한 우리말로는 ‘왕자병’ 내지 ‘공주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병’이라는 단어가 꽤나 적확한 것이, 실제로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고, 이 단어는 좁은 의미로 ‘거울 등을 통해 본 자기 자신의 모습에 성적 충동-리비도-를 느끼는 일종의 정신 질환’을 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단어로서의 ‘나르시시즘’ 혹은 ‘나르시스트’는 여기서부터 어의가 상당히 확장되어서, 단순히 성적인 충동을 느끼는 것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아도취, 근거없는 자신감에서 나아가 심지어는 긍정적인 의미로의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저는 이 단어 나르시시즘에 대해, 아니 좀 더 돌아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나르키소스’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한 번 해석해볼까 합니다. 제목에서도 나왔지만 21세기에 들어, 나르키소스의 신화적 텍스트를 해석해서 적용할만한, 흥미로운 현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그게 ‘게임’이라는 걸 벌써 눈치채셨겠고 말입니다. 아, 제목 짓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나르키소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빼어난 미모를 지닌 젊은이였습니다. 주변의 모든 아낙이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그 모든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어느 날 에코(메아리를 상징하는 인물)라는 숲의 요정이 사냥을 온 나르키소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그녀는 마음을 전달하는 데 실패하고, 숲 속에 홀로지게 됩니다. 실연의 충격으로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 목소리만 남긴 채 죽게 되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나르키소스에게 그녀와 같은 (짝사랑의 고통의) 형벌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는 잘 아시는대로, 우연히 물을 마시기 위해 샘에 간 나르키소스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지만 그것은 물에 비친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깎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물가에 피는 수선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만든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와 그 단어를 널리 퍼지게 만든 프로이트는 이 신화의 이야기에 리비도라는 키워드를 끼워넣습니다. (프로이트 답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이미지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진 1899년부터 백년이 넘게 지나는 동안 많이 희석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보자면, 오히려 100년간 사용된 용어라는 점이 이 이야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하려는 해석은 딱히 새로운 것은 아니고, 아이디어 자체도 상당히 오래된 것입니다. 나르키소스가 사랑에 빠진 모습이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에 주목해 봅시다. 다시 말해,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것의 복제된 이미지를 본다. 그렇습니다.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에 적합한 것인가는 둘째 치더라도, 적어도 수면에 비친 나르키소스의 모습은 진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의 수준 낮은 일부분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인격을 대입해 봅시다. 이 경우 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보다, 자신이 아름다워 보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외모든 무엇이든)을 보려 한 것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을 볼 때 좋은 부분만 보려 하고 나쁜 부분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뭐 사실 자기 자신을 볼 때 긍정적인 부분을 주로 보게 되고 부정적인 면을 무시하려 하는 것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일 수도 있죠. 그러나 문제는, 나르키소스는 바로 그런 부분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성하는 부분 중 일부에만 빠져서 전체적인 자신의 그림을 놓치고 그에 따라 파멸하게 되는 것이지요. 현실로 가져온다면, 삶의 부분중 일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삶 자체를 잃게 되는 현상에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쾌락중추를 자극하는 버튼만을 누르며 먹이를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죽게 되는 흰쥐 실험과 같이 말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아실 것 같습니까? 네. 드디어 제목의 나머지 절반이 드러납니다.
애석하게도, 이 문제의 답은 지금 ‘게임’인 것 같습니다.
게임이라는 것을 제 용어를 이용해서 말하자면 ‘어떠한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고안된 전자화된 입출력체계’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단어 ‘게임’은 일반적으로는 ‘컴퓨터 게임’, ‘콘솔 게임’, ‘온라인 게임’, ‘모바일 게임’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포함하지만 ‘보드 게임’이나 ‘사냥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제가 사용하는 단어 ‘게임’은 꽤나 폭이 넓은 편이며, 저는 이만큼 게임이라는 것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 게임이란 너무나도 강력한데, 그에 따라 현대사회는 게임과 관련한 각종 문제를 끌어안는 중입니다. 사실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게임과 비슷한 속성을 지니는 많은 취미분야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낚시때문에 가정이 파탄난다는 이야기도 꽤 듣는 이야기이고, 도박때문에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들 중 게임만 나르키소스 이야기에 연결시켜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footnote]제 생각으로는 인터넷이라는 범위까지는 논의를 무리없이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쓰기에는 우선순위가 좀 낮은 것 같네요.[/footnote]
그 이유로는,
첫째, 현재 그 어떤것도 게임보다 사회에 큰 문제를 가져다주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인격의 일부분이 투영된다는 이미지는,
가상의 세계가 구현되는 게임에서 제일 강합니다.셋째,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게임이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임에 빠지는 행위가 나르키소스적 파멸을 불러일으킨다는 논리에 많은 분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을때,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에게 제공되는 게임의 폭력성을 지적했습니다만, 친구 중 한 명이 ‘폭력성이고 선정성이고 다 나중 문제다. 결국 게임의 가장 큰 문제는 재미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게임은 ‘너무’ 재미있고, 그 때문에 아동, 청소년, 요즘은 청년층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게임에 쏟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녀가 ‘폭력성’ ‘선정성’이 없는 게임을 한다고 해도, 하루 열시간을 컴퓨터 앞에 붙어있다면 문제겠지요.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많은 현대의 나르시스트 청소년들이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 대신에 모니터에 뜬 자신의 아바타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게임들은 대개 폭력적입니다. 불행한 일이죠.
왜 게임이 나르키소스적 문제를 일으키는가에 대해서는 약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게임의 피드백은 현실의 피드백보다 크고 자극적이다.
대부분의 게임은 승리/패배 내지 성공/실패의 구분을 명확히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쉽습니다.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들의 승패보다 게임의 승패는 명확하게 다가오며, 그런 의미에서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패배는 감봉(용돈의 감소), 구속(자유시간의 감소), 모욕(명예의 감소), 성적의 감소 등으로 나타나지만, 게임에서의 패배는 아바타의 죽음과 같이 좀 더 강력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사람이 좀 더 강한 자극을 찾아 게임에 열중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2.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 현실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쉽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유저가 언젠가는 승리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됩니다. 그것이 PvE건 PvP건 말이죠. 1번에서 말한 것처럼 강한 피드백은, 현실의 모호한 승리보다 훨씬 강렬하고 용이하게 게이머에게 승리의 감정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현실보다 게임이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예를 들어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대개 전자적인 게임의 문법체계 자체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시죠)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장기적으로 게임과 멀어지게 되고, 게임을 하더라도 일정이상 몰입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나르키소스적인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게임의 대부분의 내용이, 패배했을 경우는 제대로 서사가 진행되지 않고 ‘다시 플레이’할 수 있도록 구성됩니다. 이것때문에 시간을 많이 쏟아 붓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대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승리하건 패배하건 인생은 진행됩니다. 그것때문에 우리는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있습니다.
3. 게임의 구조가 ‘현실의 나와는 또다른 나’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쉽게 한다.
이것은 게임과 다른 취미활동의 차이입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 안에 구성된 것처럼 사용자에게 다가갑니다. 또한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이 채택하고 있는 아바타 구조는, ‘나’는 별볼일 없지만 ‘내 캐릭터’는 강력하다/유명하다/인기있다는 식의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낚시, 마작 같은 다른 패가망신형 취미와도, 소설, 만화, 영화와 같이 게임과 자주 비교되는 여가활동과도 구분되는 특성입니다. 게임을 나르키소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4. 현실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게임이 지닌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 있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현실에서 더욱 약한 피드백을 받고, 더욱 승리하기 힘들어지고, 현실의 ‘나’가 갈수록 보잘것 없어지는 현상입니다. 이는 교육제도 및 양육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한국의 체계에서는 수능으로 대표되는 교육제도로의 집중이 심화되고, 따라서 강한 경쟁때문에 승리하기 힘들어지고, 대입공부 이외의 분야의 피드백을 잃고(혹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얻으며) 그에 따라 공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제도에 불만이 있으면서도 체념하듯 순응하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자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1~3번의 요소가 더욱 증폭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씩 현실에 흥미를 잃어가고 동시에 게임 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각박한 현실보다는 적어도 승패의 기준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게임이 더욱 살아볼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게임에 빠져 현실을 파멸시키는 섀도 나르시스트[footnote]이 '새로운' 나르시스트들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헤메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는데 이미 사용된 적이 있더군요. 급한 김에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 용어 중 '섀도우'를 차용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에 의해 억압된 자아의 부분을 의미하는 듯 싶은데, 인간의 의식을 현실로 바꾸면 의외로 맞아 떨어지는듯한 느낌이 들어서요.[/footnote]들이 우리 주변에는 꽤나 많이 있습니다. PC방에서 연속으로 수십시간 게임을 하다가 사망한 사람은 조금 극단적인 예이지만, 잠깐 하고 끝낼 생각이었던 게임을 놓지 못하고 학업에 지장을 가져오는 학생이나, 너무 게임에 빠져들어 친구들과의 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거나, 30세가 다 되어도 게임과 온라인에 빠져 부모로부터 자립할 수 없다던가….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부터 어떻게 보면 심각한 것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지금 섀도 나르시스트 문제는 이 문제를 처음 겪었던 80년대 중후반 출생 세대가 사회활동을 할 나이가 되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후 90년대 출생 세대가 사회활동을 하게 될 10년 후 쯤에는 이 문제는 더욱 더 큰 규모로 일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세대의 차이는 간단히 말해 ‘설날에 친척 또래들과 뭘 하고 놀았나’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거리에서 들에서 뛰어다니며 놀았다면, 후자는 방에 모여 핸드폰과 NDS를 들고 놀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9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가 무섭습니다. 대체 어떤 모습으로 사회에 나타날지……. 우리 세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시에,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 빨리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여 해결하여 할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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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상용게임이 그런 나르시시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게임을 할 때 "나는 대단해!"라는 착각이 들 때가 많아요. 버튼 누르는 것만으로 슈퍼히어로가 되는 느낌을 주니까요. 그런 만족을 주는 것이 상용게임의 미덕처럼 여겨지고, 그런 만족감이 부족할 수록 돈을 낸 가치가 없다고 생각는 것도 안타깝습니다. 매니아 게이머들이 긴 플레이타임과 다양한 할 것(자유도)을 가진 게임을 선호하는 걸 보면 자신의 대단함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아닐까도 해요.
답글삭제반면, 제이슨 로러의 Passage 같은 대안 게임을 보면, 나르시시즘은 커녕 만족도 주지 않죠.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게임이 나를 '중심'으로 한다면, 그렇지 않은 게임은 나와 세상과의 '평형적인 관계'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아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 듯 보이는 Passage 역시 그렇구요.
p.s. 이런 주제를 볼 때면, 항상 이 사진이 생각납니다. http://persian8.com/2511143
@퍼플렉싱 - 2009/08/03 22:04
답글삭제확실히,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을 쉽게 제공하기에, 이런 의미에서 게임은 어느 정도 현실의 대체재로써 작동한다고 봅니다. 현실에서 얻기 힘든 감각과 감정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할까요. 저는 이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주신 링크처럼 '훌륭한 대체재'로써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면모 때문에 많은 사람의 현실이 파탄난다는 점이죠(...)
대안 게임이나 시리어스 게임 쪽의 문제점은,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게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통 게이머들이 게임을 즐기는 루트와 완벽히 반대편에 있다는 점이 슬프다고 할까요. 이런 게임들을 잘 보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을텐데...